김삼기 / 시인, 칼럼리스트
우리 모두는 과거를 극복하거나 마래를 개척하기 위해 ‘목적이 있는 삶’을 살아야 하는 존재다.
그러나 사람이나 세상과가 이해관계가 필요 없는 어린이는 ‘목적이 있는 삶’을 살지 않아도 된다.
그리스어로 ‘파이디아(paidia)’란 말이 있는데, 이는 통제되지 않은 상태에서 즉흥적으로 벌이는 ‘어린이다운 것을 나타내는 놀이’로 ‘무목적의 목적’을 지향하는 인간의 본능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예술을 놀이의 관점에서 미적 쾌락을 중시했던 칸트(Immanuel Kant) 역시 미적 경험은 실용적인 목적이나 이해관계가 없이 그 자체가 목적이 될 때 경험할 수 있다는 주장을 했다.
노동과 달리 미를 추구한다는 것은 어떤 궁극적인 목적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무목적의 목적’이어야 한다는 게 칸트의 생각이었던 것 같다.
결론적으로 예술은 어린이나 파이디아(paidia)나 칸트의 생각처럼 ‘무목적의 목적’이라는 이율배반적인 원리가 작동하는 공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쉼에는 세 가지 유형이 있다고 볼 수 있는데,
피곤해서 쉬는 쉼은 쉬는 게 목적으로 과거지향적이고, 일하기 위해 쉬는 쉼은 쉬는 게 수단으로 미래지향적이고, 그냥 쉬는 쉼은 쉬는 게 수단도 목적도 아닌 것으로 현재지향적이라 할 수 있다.
같은 원리로, 교회 가서 기도하는 신자도 세 가지 유형이 있는데,
지난 한 주를 반성하기 위해 기도하는 신자는 과거지향적이고, 다음 주 계획을 놓고 기도하는 신자는 미래지향적이고, 반성도 계획도 없이 그냥 기도하는 신자는 현재지향적인 신자라 할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예술세계는 현재지향적인 ‘무목적의 목적’이라는 이율배반적인 원리가 다른 분야보다 많이 적용되고 있는 곳이다.
그래서 예술가는 일반인과 달리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미래에 대한 걱정이나 기대도 하지 않고, 현재에서 최선을 다하며, 현재 속에서 행복을 찾고 누리는 현재지향적인 삶을 살아가는 편이다.
진정한 예술가는 수단과 목적도 아닌 그냥 좋아서 예술행위를 하는 ‘무목적의 목적’의 삶을 사는 이율배반적인 사람이라는 의미다.
그런데 예술가가 유영해지기 시작하면, 그 때부터 이율배반적인 삶에서 벗어나 목적이 있는 삶을 설계하고, 결국은 자신이 설계한 그 목적에 이끌리어 사는 일반인과 다름없는 삶을 사는 게 안타까운 현실이다.
예술가는 자신의 의도나 목적 없이, 그리고 자신의 이념이나 의지가 작동하지 않은 상태에서 떠오르는 영감을 작품의 소재로 삼아야 걸작을 만들 수 있다.
조금 유명해졌다고 자신의 작품을 값으로 흥정하고, 부와 명예를 얻을 수 있는 방향으로 작품을 만들어가고, 이래서야 어떻게 진정한 예술가가 될 수 있겠는가?
혼과 정신세계를 다루는 예술가는 이 땅에서 목적이 없는 목적과 함께 현재지향적인 삶을 살아야 예술가로서의 가치를 높일 수 있을 것이다.
예술가가 추구하는 세계는 시간 개념이 아닌 존재의 개념이듯이, 우리 일반인도 가끔 현재지향적인 ‘무목적의 목적’의 삶에 도전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일반인도 어떤 일에 몰두할 때는 목적을 생각하지 않고 일에만 집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무목적의 목적’이 현대인에게 맞지 않다고 할지 몰라도, 선진국일수록 현재지향적인 사람들이 많다는 점을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 한다.
[단상]
오늘은 과거도 미래도 생각하지 않고, 오늘 하루만 생각하면서 ‘무목적의 목적’의 삶을 느껴보면 어떨까요?
그리고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목적인지, 수단인지, 아니면 그냥 하는 일인지 체크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