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기 / 시인, 칼럼리스트
1970년대 말 개인용 컴퓨터(PC)가 보편화되면서부터 인류는 지난 40여 년 동안 수많은 기록물을 컴퓨터에 저장(貯藏)해 두기 시작했다.
아직까진 계산과 정보수집과 각종 작업수행 등이 컴퓨터의 주요 역할지만, 아마 100년쯤 후에는 ‘저장貯藏)’이 가장 중요한 역할이 될지도 모르겠다.
인류의 역사가 컴퓨터 안에 다 저장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부잣집 곳간엔 쌀과 각종 곡식이 가득했고, 장독대에도 여러 종류의 식자재가 항아리에 저장되어 있었고, 마당 한 쪽에도 장작이나 볏단이 풍성하게 쌓여 있었다.
“많은 것을 저장해두어야 행복하다.”는 저장문화가 예나 지금이나 우리 사회에 깔려 있어, ‘저장貯藏)’이 부의 척도로 자리매김해왔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부잣집 주인이 곳간이나 장독대에 저장된 많은 것들 중, 해가 되거나 불필요한 것들은 없애야 하듯이, 인류도 이제는 지난 40여 년 동안 저장해둔 기록물들 중, 해가 되거나 불필요한 것들은 하나씩 삭제(削除)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저장물이 풍성한 저장문화와 함께 해가 되거나 불필요한 것들을 ‘삭제(削除)’해야 하는 삭제문화도 공존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최근 전 세계적으로 불필요한 저장물을 삭제하는 긍정적인 삭제문화는 보이지 않고, 삭제해서는 안 될 저장물을 삭제하는 부정적인 삭제문화만 보이는 것 같아 안타까울 뿐이다.
우리나라만 해도 대통령 기록물을 삭제하고, 불법을 숨기기 위해 휴대폰 자료를 삭제하고, 월성원전 파일도 삭제하고, 그래서 우리나라가 부정적인 삭제문화의 온상 같기도 하다.
수 십 년 전에 일어났던 미투나 학폭 사건도 어디엔가 저장된 자료 행방을 놓고 싸우는 있는 꼴 역시 부정적인 삭제문화의 양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미국에서도 부정적인 삭제문화가 취소문화(Cancel Culture)라는 이름으로 성행하고 있다고 한다.
미국의 취소문화(삭제문화)는 최근 빅테크 기업들을 비롯한 정권을 잡은 민주당 지지층이 자신들에게 동조하지 않는 상대편 세력에 대한 모든 것을 삭제해 버린다는 데서 나온 신조어다.
실제로 미국 사회에서는 최근 SNS 포스팅은 물론이고, 유튜브 영상, 서적 등 다양한 분야에서 보수적인 공화당 지지자의 모든 것이 삭제되고 있다.
트위터와 페이스북, 유튜브 등에서도 IT기업들이 자신들의 구미에 맞는 콘텐츠가 아닐 경우 갖가지 명분을 씌워서 계정을 정지시키거나 아예 삭제해버리는 행위도 잦아졌다고 한다.
실제 바이든 행정부는 트럼프 행정부의 모든 것을 지워버리려는 시도를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민주당 중심의 삭제문화가 과한 나머지 역풍을 맞을 것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어, 미국 사회는 당분간 삭제문화의 늪에서 빠져나오기가 힘들 것 같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나라만큼 삭제문화의 뿌리가 깊은 나라도 없을 것이다.
과거 사건에 대한 기억을 빠른 기간에 잘도 지워버리는 국민이 바로 우리나라 국민이다.
어차피 우리나라가 저장문화와 함께 갈 수밖에 없는 삭제문화를 받아들여야 한다면, 불필요한 것과 좋지 않은 기억을 삭제하는 긍정적인 삭제문화로 발전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또한 공적인 업무를 담당하는 공무원일수록 자신이나 속해 있는 단체에 불리한 공적인 어떤 자료라도 절대 삭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나라가 지금 미국 사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부정적인 취소문화(Cancel Culture)의 우를 절대 범해서는 안 된다.
하루에도 컴퓨터상에서 수 십 번씩 ‘저장’과 ‘삭제’를 클릭하는 우리 모두는 ‘저장문화 & 삭제문화’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단상]
긍정적인 삭제문화는 우리 사회를 아름답게 만들지만, 부정적인 삭제문화는 우리 사회를 혼탁하게 만들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