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기 / 시인, 칼럼리스트
어렸을 때 할머니로부터 나쁜 짓을 하면 마귀할멈이 와서 벌을 주거나 잡아간다는 전래동화를 많이 들었다.
그래서 마귀할멈은 착한 사람은 해치지 않고 나쁜 사람만 괴롭히거나 해치는 악한 존재로 알았다.
우리나라 고대소설의 경우도 대부분 선과 악이 싸워서 선이 이기고 악이 지는 권선징악으로 이루어졌다.
여기서도 악한 역할을 담당하는 동물 등이 등장하여 악을 징벌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성경에서도 죄 짓는 자들이 사탄으로부터 괴롭힘을 당하고 저주를 받는다고 나와 있다.
위 세 가지 예에서 마귀할멈이나 악을 담당하는 동물이나 사탄이 잘못하거나 죄 짓는 자를 벌하는 있으니, 역설적으로 이들은 정의를 실천하는 의로운 존재로도 볼 수 있다.
선한 자를 벌했다면 악한 존재가 맞지만, 악한 자를 벌했으니 당연히 의로운 존재로도 해석될수 있다는 말이다.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나쁜 짓을 하면 마귀할멈이 아닌 법관할아범이 벌을 주고, 선과 악이 싸울 때도 정의의 사자가 악을 징계하고, 죄 짓는 자들도 공의의 신이 벌을 주어야 이치에 맞다.
그런데 우리는 마귀나 사탄은 선하고 의로운 자를 괴롭히거나 패망의 길로 유도하는 존재이고, 결국은 죽음의 길로 가게 만드는 악한 영이라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윤리도덕과 관련해서는 악한 자를 벌하는 의로운 존재로도 많이 인정해왔다.
위 세 가지 예에서 우리가 마귀나 사탄과 같이 악한 존재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그래서 잘못 적용하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이치에 맞지 않지만 전혀 거리낌 없이 인정해왔던 악한 존재에 대한 잘못된 해석을 명쾌하게 합리화시키는 방법은 없을까?
그것은 법관할아범과 정의의 사자와 신이 각각 마귀할멈과 악한 동물과 사탄을 시켜서 죄 짓는 자를 벌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죄 지은 자를 선한 존재가 괴롭히거나 해치는 것은 선한 존재의 정체성에 맞지 않기 때문에, 어차피 본능적으로 악한 존재를 활용하고 있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악한 존재가 우리를 헤칠 때, 그 악한 존재는 다만 선한 존재의 지시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선한 존재를 상대로 해결점을 찾아야 한다.
우리가 아무 잘못이 없는데도 악한 존재나 상황으로부터 고난을 받거니 치명적인 피해를 당한다면, 우리는 선한 존재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빨리 깨달아야 한다,
기독교도 어려움이 닥치면 그 어려운 상황에서 해답을 찾으려 하지 말고, 그 상황을 뛰어 넘어 신(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아는 게 중요하다고 가르친다.
선한 존재가 악한 존재 보다 훨씬 크고 그래서 선한 존재가 악한 존재를 지배하고, 신이 사탄 보다 훨씬 크고, 그래서 신이 사탄을 지배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우리가 악한 존재를 만날 때, 그보다 훨씬 더 큰 선한 존재를 생각하면 된다.
그리고 선한 존재는 선한 일만 좋아하고 악한 일은 싫어한다는 사실도 명심하고, 명심보감에 인용된 한나라 소열제(유비)가 임종 시 아들 유선에게 남긴 한 구절도 기억하면 좋겠다.
勿以善小而不爲(물이선소이불위)하고, 勿以惡小而爲之(물이악소이위지)하라.
(선한 일은 작은 일이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되며, 악한 일은 작은 일일지라도 하면 안 된다.)
감춰진 인간의 본성을 연구한 책 ‘휴먼카인드’에서 저자 ‘뤼트허르 브레흐만’은 “인간은 선한 측면을 강하게 선호하고, 선한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이 더 오래 생존한다.”고 밝힌 바 있다.
우리는 선한 존재는 선한 일을 좋아하고, 사람도 선한 측면을 선호하고, 결국 선한존재는 사람 편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식하면서, 악한 존재보다 훨씬 더 큰 선한 존재와 소통해야 한다.
[단상]
선한 존재와 함께 그리고 선한 일과 함께 출발하는 월요일 아침이 되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