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기(1959) / 시인, 칼럼니스트
70년대 후반, 고등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한 후, 입시공부로 인해 누적된 피로도 풀 겸 친구와 함께 하모니카를 하나씩 구입하여 각자 집에서 열심히 연습하기로 했다.
그런데 1주일 쯤 되었을 때, 나는 하모니카를 제대로 부르지 못했으나, 친구는 자신이 알고 있는 가요 대부분을 하모니카로 완벽하게 부르고 있었다.
친구는 ‘고향의 봄’이라는 쉬운 곡을 골라 계이름을 외워 하루에 수 십 번씩 불렀더니, 음감이 살아나 평소 알고 있는 모든 노래를 계이름 없이도 하모니카로 부를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대학 졸업 후, 사회 초년생 때는 직장 동료 5-6명이 함께 모여 세상 돌아가는 판을 정확하게 알기 위해, 신문에 나오는 한 주간의 이슈를 주제로 토론하는 모임에 참여했다.
당시 토론회에서 유독 기사의 내용을 정확히 꿰뚫고 있는 H 회원은 토론 모임 회원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알고 보니, 다른 회원들은 한 주간 이슈만을 탐독해서 토론을 준비했지만, H 회원은 이슈 외에 다른 모든 기사도 섭렵하며 토론을 준비했던 것이다.
위 두 예에서 친구나 H 회원은 둘 다 결과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지만, 결과를 얻기 위한 방법은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친구는 노래 한 곡만을 집중적으로 연습하여 하모니카 원리를 터득하게 되었고, H 회원은 여러 가지 다양한 기사를 통해서 이슈를 분석하는 혜안을 가졌던 것이다.
왜, 반대로 여러 곡을 연습했던 나나 이슈 기사만을 탐독했던 다른 회원들은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을까?
오늘 새벽 위 두 개의 추억을 더듬으면서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하모니카 연주 같은 원리(본질本質)를 알려면 깊이(深)가 중요하고, 세상의 이슈 같은 현상(現象)을 알려면 다양성(넓이博)가 중요하다는 것을,
무조건 본질(本質)만 중요시하거나 현상(現象)만 중요시하다가 나나 다른 회원들 같이 능력 발휘를 제대로 못하는 우를 범치 말아야 한다.
수학이나 물리, 화학 과목처럼 원리가 중요한 과목은 깊이(深)로 공부를 해야 하지만, 국사나 세계사 과목처럼 현상이 중요한 과목은 넓이(博)로 공부를 해야 한다.
반대로 하면 효과가 날 수 없다.
수학이나 물리, 화학 과목은 하나의 원리만 알면 그 다음 단계가 다 적용되어 무척 이해가 빨라지고, 국사나 세계사 과목은 하나의 원리만 가지고는 안 되어 다양한 상황들을 접해야 이해가 빨라지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나라 정치가 본질적인 문제는 본질적인 차원으로 다루고, 현상적인 문제는 현상적인 차원으로 다뤄야 하는데, 당리당략만 생각하면서 본질적인 문제를 현상적인 차원으로 다루고, 현상적인 문제를 본질적인 차원으로 다루고 있으니 문제다.
대통령이 외국 정상과 회담할 경우, 회담의 본질적인 성과에 대한 평가는 간단하게 논하면서 현상에 불과하는 넥타이 색깔을 운운하며 공격한다거나, 넥타이 색깔에 대해 가볍게 얘기하면서 넥타이 색깔에 깔린 엄청난 의미를 부여 하며 공격하는 것이 모순이라는 말이다.
언론도 깊이 있게 다뤄야 할 국가의 안보나 경제 문제 같은 본질적인 문제는 몇몇 사례를 들어 대충 넘어가고, 다양하게 다뤄야 할 사회나 문화 같은 현상적인 문제는 집중 분석하여 보도하고 있으니 문제다.
우리 사회도 국민성이나 전통적인 뿌리 같은 본질적인 문제는 깊이 있게 다뤄야 하고, 스포츠나 예능 같은 현상적인 문제는 넓고 다양하게 다뤄야 하는데, 그 반대로 가는 것 같아 안타깝다.
더 안타까운 것은 본질적인 문제와 현상적인 문제를 구분하지 않고 혼용해서 적용할 때, 여야문제나 노사문제 같은 극대극의 갈등을 영원히 풀 수 없다는 점이다.
이제라도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본질(本質)적인 건지 현상(現象)적인 건지 잘 생각해 보고, 깊이(深)로 대처할 건지 넓이(博)로 대처할 건지 잘 판단해야 한다.
본심현박(本深現博)으로,
정부도 국가의 본질적인 차원의 법은 깊이 있게 다루고, 현상적인 차원의 복지는 넓고 다양하게 다뤄야 할 것이다.
[단상]
우리 사회가 깊은 공의와 넓은 사랑으로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본심현박本深現博은 제가 임의대로 만든 사자성어니 이해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