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기 / 시인, 칼럼니스트
추석연휴에도 어김없이 평소 새벽에 다니던 산을 아내와 함께 다녀왔다.
그런데 어제(20일) 등산에서는 평소보다 30분 이상 더 걸렸다.
아내가 등산로에 떨어져 있는 도토리와 상수리가 사람들 발에 밟히면 못쓰게 된다며, 도토리와 상수리를 주워 누군가 필요한 사람들이 가져가라고, 등산로 옆에 종이를 깔고 올려놓느라 시간이 지체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산 정상 벤치에 앉아 잠깐 쉬면서 아내에게 등산할 때는 등산에 열중해야지 누군가를 위해 도토리를 줍는 건 아니라고 말하자, 아내는 좋은 일도 하는 거니 맞는 거라고 말했다.
그 때 옆에 앉아 있던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두 자매의 대화도 아내와 나의 대화처럼 “맞다. 안 맞다”의 내용 같아, 귀 기울여 들어봤다.
언니 : 이 건 아니라고 봐 ~
동생 : 기라고 봐 ~
언니 : 아닌 건 아닌 겨 ~
동생 : 긴 건 긴 겨 ~
자세히 들어보니, 계속 웃음과 함께 장난 섞인 두 자매의 대화가 추석연휴 전에 막을 내린 KBS2 주말극 ‘오케이 광자매’의 엔딩 대사였다.
나도 아내와 함께 ‘오케이 광자매’를 계속 시청했는데, 매 회마다 빠짐없이 나오는 대사가 “이 건 아니라고 봐”와 “아닌 건 아닌 겨”라는 아버지의 구수한 충청도 말투였다.
“이 건 아니라고 봐”와 “아닌 건 아닌 겨”는 극중에서 아버지가 딸들의 생각이나 행동이 잘 못되었다고 판단되거나, 아버지 자신의 생각이나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판단 될 때 주로 하는 말이다.
극중에서 아버지는 처음엔 자신의 입장에서 생각하지만, 결국은 딸들 입장에서 고민하게 되고, 자신의 생각이 맞는 것 같으면 ‘아니라’는 생각을 고수하고, 딸들의 생각이 맞는 것 같으면 슬쩍 한발 물러섰다.
특히 아버지는 뭔가 양심꺼리는 비밀이 탄로 날 상황에서 “아니다”고 단호하게 말하지 못하고, 고개를 살짝 저으며 애매한 표정으로 “이 건 아니라고 봐”에 이어 “아닌 건 아닌 겨”라고 말하곤 했다.
하산하면서 내가 아내에게 “등산할 때는 등산에만 열중해야 한다.”며, “이 건 기라고 봐”라고 말하자, 아내는 “아니라고 봐”라고 말했고, 다시 내가 “긴 건 긴 겨”라고 말하자, 아내는 “아닌 건 아닌 겨”라고 말했다.
아내와 나는 ‘오케이 광자매’ 대본을 쓴 작가가 왜 극중에서 “이 건 아니라고 봐”와 “아닌 건 아닌 겨”라는 대사만 계속 사용하다가, 마지막 엔딩 장면에서 “기라고 봐”와 “긴 건 긴 겨”라는 대사를 딱 하번만 사용했는지 궁금해 하면서 하산했다.
사실 우리는 일상에서도 “긴 건 긴 겨”와 같이 긍정적인 말보다 “아닌 건 아닌 겨”와 같이 부정적인 말을 더 많이 사용해왔고, 그래야 의사표현을 더 효과적으로 할 수 있다고 여겨왔다.
우리는 왜 부정적인 표현에 더 익숙하고, 부정적인 표현에 더 반응하고 있는 것일까?
성경의 십계명에서도 4계명 “안식일을 지켜라”와 5계명 “부모를 공경하라” 외 다른 8개의 모든 계명이 “하지마라”라는 부정적인 명령문으로 메시지가 구성되어 있다.
안전운전을 위한 홍보 캠페인도 “교통질서를 잘 지킵시다.”와 같은 문구보다 “사망사고 많은 지역” 같이 부정적인 문구를 더 많이 사용하고 있고, 심지어 어떤 지자체는 사고 나서 찌그러진 차를 길옆에 세워 놓고 운전자들에게 “사고 나면 이렇게 된다.”는 부정적인 자극을 주면서 안전운전 캠페인을 벌이기도 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도 어렸을 때, 어머니로부터 “무엇 무엇을 하라”는 말보다 “무엇 무엇을 하지마라”는 말을 더 많이 들었던 것 같다.
우리 사회가 부정부패로 가득했고, 선을 행하기 보다 악을 물리치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을 소비해야했기 때문에, 긍정적인 말보다 부정적인 말이 우리 사회에 더 많이 자리잡고 있다는 게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오케이 광자매’ 작가가 쓴 “이 건 아니라고 봐”와 “아닌 건 아닌 겨”라는 대사가 시청자로부터 사랑을 받고, 벌써부터 유행어로 뜨는 이유가 바로 우리 사회가 이미 부정적인 말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바라기는, 내년 대선을 향해 뛰는 후보들이 상대 후보의 공약에 대해, 무조건 “아닌 건 아닌 겨”라고 공격하기보다 좋은 공약에 대해서는 “긴 건 긴 겨”라고 대응하면서 자신의 공약에 더 집중하면 좋겠다.
우리 국민들도 “아닌 건 아닌 겨”라는 부정적인 말보다 “긴 건 긴 겨”라는 긍정적인 말을 더 많이 사용하면 좋겠다.
아울러, 꼭 해야 할 올바른 생각이나 행동 앞에서는 “긴 건 긴 겨”를 힘차게 외치되, 꼭 하지 않아야 할 생각이나 행동 앞에서는 “아닌 건 아닌 겨”도 힘차게 외치는 대한민국이 되기를 바란다.
[단상]
추석을 맞이하여 가족과 함께 충전한 넉넉한 마음으로 일상에서도 승리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