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기 / 시인, 칼럼니스트
우리나라 컴퓨터 자판에는 세계적으로 표준화된 영어의 알파벳 키에 한글의 모음 및 자음이 겹쳐있는 메인 키가 있고, 그 외 보조키가 여러 개 있다.
특히 보조키 중에 한글과는 전혀 상관없는 키가 있는데, 컴퓨터 자판의 좌측 중단에 위치하여 영어 대문자와 소문자를 바꿔주는 Caps Lock 키다. (Caps:대문자, Lock:자물쇠)
Caps Lock 키를 눌러 기능을 활성화하면 영어 알파벳은 기본적으로 대문자로 입력되고, 다시 한 번 키를 눌러 기능을 해제하면 소문자로 전환된다.
한글이나 한자를 비롯하여 아랍 문자, 태국 문자에서는 대문자와 소문자의 구별 없이 한 가지 형태의 문자만 쓰지만, 유럽계열의 언어 문자에서는 같은 글자를 대문자와 소문자로 구별하여 쓴다.
유럽계열의 문자도 처음에는 대문자만 존재했는데, 이는 고대사회가 점토나 딱딱한 재질에 문자를 써야 해서 주로 직선으로 이루어진 대문자가 편리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후 파피루스, 양피지같이 부드러운 재질의 기록매체가 생기면서 곡선을 표현하는 것이 쉬워졌고, 빠르고 편리하게 필기하기 위해서는 곡선을 많이 써서 획수를 줄일 필요가 있어 생긴 글자가 소문자라고 한다.
대문자와 소문자의 역사도 생산자 위주 사회에서 소비자 위주 사회로 바뀌는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기업이 상호나 로고를 대문자로 표기해 웅장함, 강함, 위업을 강조했던 20세기까지와는 달리, 소비자 중심시대에 맞춰 친근감 있고. 접근성이 쉽고, 단순한 이미지의 소문자를 많이 사용하게 되었다.
a부터 z까지 모든 것을 판매할 수 있다는 의미의 amazon은 소비자와 쉽게 접근하기 위해 회사 로고를 소문자를 사용하고 있고, 세계적인 SNS기업 facebook도 접촉자들과의 친근감을 위해 소문자를 사용하고 있다.
한국의 철강기업 포스코도 처음에는 강인한 이미지의 대문자 POSCO를 회사 로고로 사용했으나, 2009년부터 소비자에게 친근감을 주는 소문자 posco로 바꿔 사용하고 있다.
세계적인 스포츠용품 업체 나이키 역시 10년 전 천문학적인 광고비를 투자하여 회사 이름을 대문자 (NIKE) 대신 소문자 (nike )로 과감하게 바꿨다.
당시 나이키 홍보담당 임원은 기업의 규모가 중요했던 1990년대는 힘 있고 견고한 대문자가 유리했지만, 2000년대 이후는 고객 중심의 시대가 되면서 몸체가 작고 부드러운 느낌의 소문자를 선호하는 시대에 발맞추기 위함이라고 말했다.
공공기관도 감성적이고 부드러운 이미지로 변신을 추구하며 CI (corporate Identity )를 소문자로 바꾸는 작업을 했는데, 한국도로공사는 CI를 'ex' 로 바꿔 공기업의 딱딱한 이미지 대신 사람냄새 나는 이미지로 변화를 꾀하기도 했다.
한국의 통신 3사도 회사 이름에는 대문자 SKT, KT, LGU+를 사용하지만, 제품에는 소문자 sk, kt, lgu+를 사용하고 있다.
전 세계 대부분의 기업들 역시 회사명은 영어 대문자로 표기하더라도 인터넷 주소나 상품만큼은 대부분 소문자를 사용하고 있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모든 단위기호(m, g, ㎡ 등)도 원래 소문자를 사용하는 게 원칙이다.
다만 A(암페어·전류), V(볼트·전압), W(와트·전력) 같이 과학자 이름을 딴 단위기호는 대문자를 사용한다고 한다.
영어 대문자가 사라지고, 그 빈 칸을 소문자가 채우고 있는 시대가 되었다는 증거다.
인류의 모든 문화가 편리함을 추구하고 있고, 세계적인 기업들이 소문자를 선호하고 있고, 무엇보다 대문자를 쓰지 않아도 글자소통에 큰 문제가 없음을 생각해볼 때, 머지않아 대문자 무용론이 나올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컴퓨터가 보급되면서 우리 노트에서 알파벳 필기체가 없어졌듯이, 편리함을 추구하는 글자문화가 전 세계에 확산되면서 책자에서 대문자와 자판에서 Caps Lock 키도 사라질 것 같다.
[단상]
굳이 대문자를 써야 한다면 소문자를 크게 쓰면 되지 않을까요?
원소 기호는 첫 글자만 대문자로 쓰고, 원소끼리 조합할 때는 둘 다 대문자로 쓴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Co는 코발트고, CO는 C(탄소) + O(산소)로 일산화탄소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