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기 / 시인, 칼럼니스트
인류가 아직 문자를 가지지 못했을 때도 언어는 존재했고, 그래서 문자 대신 언어로만 모든 의사를 전해야만 했다.
이렇게 단순히 언어로만 의사를 전하던 시대를 구전시대(口傳時代)라고 부르고, 이 시기에 언어로 전해지는 문학을 구전문학(口傳文學)이라고 한다.
그리고 문자가 생기기 전까지의 구전시대뿐만 아니라, 인쇄술이 발달하여 문자가 널리 보급되기 전까지도 이야기(문학) 외에 역사나 사건이나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상황은 대부분 입으로만 전해졌다.
특히 신화나 전설이나 설화가 오랜 기간 동안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구전시대의 대표성을 지닌 구전시대의 산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 전해질수록 내용이 추가되거나 변질되고, 나중에는 완전히 다른 내용이 될 가능성이 높았는데도, 구전시대의 역사나 사건이나 특히 문학이 나름대로 생명력을 가지고 그 명맥을 이어왔다.
그렇다면, 구전(口傳)에 무슨 신통한 비밀이라도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전설이나 기적같이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들을 때는 반신반의하다가도 그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전할 때는 스스로가 들었을 때보다 훨씬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전하는 인류의 속성에서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우리는 어린 시절 친구나 부모로부터 ‘전설따라 삼천리”에 나오는 귀신 이야기를 들을 때는 잘 믿지 않았지만, 자신이 다른 친구나 누군가에게 그 이야기를 직접 전할 때는 완전히 사실 같이 이야기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남으로부터 수많은 기적 같은 이야기를 들을 때도 의심했지만, 그 기적 같은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전할 때는 전에 의심했던 기적 같은 모든 이야기들을 다 믿었던 것처럼 확실하게 말했던 경험이 있다.
구전의 특징이 바로 들을 때보다 전할 때, 더 많은 믿음을 가진다는 것이다.
즉, 귀로는 의심하며 듣지만, 입으로는 의심없이 내뱉는 인류의 속성처럼, 구전(口傳)도 입으로 전하면서 확실한 믿음을 가지는 특징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인류의 속성 때문에 인류의 고대 역사가 특히 신화나 전설이나 설화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데도 일관성을 가지고 그 명맥을 이어왔던 것이다.
또한, 어떤 이야기를 듣고 말로 전할 때 나타나는 구전의 비밀이 자기 의(義)를 드러내려는 인류의 속성에도 있는 것 같다.
사실 4차산업혁명시대를 살고 있는 지금도 중요한 역사나 사건 등이 문자나 영상 외에 구전으로 전해지고 있고, 우리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이야기들 대부분이 입에서 입을 통해 구전으로 전해지고 있다.
지난주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후보와 홍준표 의원이 배석자 없이 비밀리에 회동을 가졌으나, 다음날 홍 의원의 구전(口傳)이 오픈되면서 원팀을 기대했던 정권교체 세력을 실망시키고 말았다.
홍 의원이 한 말을 윤 후보가 듣고 그 말을 선대본부에 전하는 단순한 과정이었는데도, 홍 의원은 자신이 말한 의도가 왜곡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선대본부 합류를 거부하고 있다.
회동 내용이 다음날 오픈 될 정도의 사안이었다면 오픈 회동을 해도 되는데, 왜 둘 만의 비밀회동을 했는지 우리 국민도 의아해 했을 것이다.
신화나 설화도 수 천 년 동안 전해지면서 그 내용이 본질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는데, 지난주 윤 후보와 홍 의원의 사건에서는 단 하루 만에 그 본질이 180도 달라졌으니, 우리 정치가 얼마나 이기적인 정치인들의 집합체인가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정치인들이 중의적인 표현을 해놓고, 상대의 반응에 따라 자산의 말을 자신에게만 유리하게 해석하는 것도 많이 볼 수 있다.
현대 정치의 구전(口傳)이 신화나 설화의 구전보다 전달력이 떨어지는 정도를 넘어 아예 정반대로 이해되고, 그래서 믿음이나 신뢰가 없다는 게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정치인 중 한 명을 선택해야 하는 3월 9일, 6월 1일이 우리 국민에게는 어떤 날로 기억될까?
우리 정치인들이 이기적인 마음은 어쩔 수 없이 가진다고 해도, 최소한 구전시대의 믿음이나 신뢰만큼은 가끔이라도 기억하길 기대할 뿐이다.
[단상]
오늘 구전(口傳)의 추억을 더듬어보면서 혹시 내 속에 잠재해 있는 구전의 비밀과 의(義)를 드러내고 싶어하는 나 자신은 아니었는지, 한 번 점검해보면 어떨까요?